지금도 긴 밤을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이슬처럼, 음울한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진주 빛을 내는 이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아침이슬로 다시 만난 세계; 어느 계엄군 딸의 고백문 그리고 천 잔의 커피
꿈도 많고, 재주도 많고, 공부까지 잘했던 우리 엄마. 하지만 외할아버지는 여자가 무슨 대학이냐며 엄마의 길을 막았다.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었던 길은 먹여주고 재워주고 능력을 인정해 주는 군대뿐이었다. 그때는 70~80년대, 차별과 억압, 꿈과 자유가 이상하게 뒤엉킨 그런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어느 날, 엄마는 광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곳에 모인 빨갱이들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그 도시에서 본 것은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들뿐이었다. 정보병이었던 엄마는 거리로 나가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들려오는 함성과 총성, 찢어질 듯한 비명과 통곡, 매캐하고 기분 나쁜 연기, 그리고 끌려오는 무고한 사람들의 부서진 몸과 당황한 얼굴들. 그 모든 것이 지옥처럼 엄마를 짓눌렀다. 홀로 진실을 찾을수록 더욱 혼란만 깊어졌다. 그 와중에도 엄마의 마음속에서는 단 하나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 반드시 이곳을 떠나야 해.’
그 시절, 여군이 조기 제대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결혼뿐이었다. 엄마는 아빠와 선을 봤고, 급히 제대와 함께 신혼 생활이 시작되었다. 시집살이는 쉽지 않았지만, 엄마는 세 딸을 낳았다. 세월이 흘러, 큰딸인 나는 프랑스 남자를 만나 외국으로 시집을 갔다. 몇 해 뒤, 엄마는 어느덧 손자와 손녀를 둔 외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올해 여름, 방학을 맞아 나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한국 엄마 집을 찾았다. 손자, 손녀를 재우고 우리 모녀는 까마득히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며 엄마의 처녀 시절까지 거슬러 갔다. 조심스럽게 흘러나온 엄마의 군대 시절의 이야기. 여군이었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날 엄마가 들려준 광주의 이야기는 아직도 엄마의 주름진 손마디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본 ‘택시 운전사’와 ‘서울의 봄’은 더 이상 멀고 복잡한 한국 현대사의 한 조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피부로 와닿는, 내 가족의 이야기였다. 14시간 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우는데, 어릴 적 설거지를 하며 양희은의 ‘아침이슬’을 부르던 엄마가 떠올랐다. 노래 끝자락에 이르면 언제나 목이 메던 엄마의 뒷모습. 엄마는 왜 그 노래만 나오면 눈물을 흘렸을까. 광주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던 미안함,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그들 곁에 있지 못했던 죄책감, 그리고 진실의 반대편에 서 있다는 쓸쓸함 때문이었을까. 엄마는 그 긴 세월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프랑스로 돌아와서도 엄마의 이야기와 영화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들은 안개처럼,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나를 조용히 짓누르고 있던 이 무게는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 잊고 있었던 것. 과거의 사람들이 감내한 희생으로 물려받은 인간의 존엄이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내 나라에 더 나은 시대를 만들고 싶다. 내 아이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미래 세대에게 더 나은 세계를, 지구를 물려주고 싶다.
지금도 긴 밤을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이슬처럼, 음울한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진주 빛을 내는 이들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다. 촛불처럼 조용하지 않고, 눈물로 호소하지 않으며, 그래서 더 강렬한 그 빛. 투명한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형형색색의 노래하는 빛들이 모여,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세상을 이루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세상이 이전보다 더 찬란하고, 더 따뜻하기를. 같은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눈앞의 이익만을 좇는 이기적인 자들이 이기지 않기를. 더 이상 쓸쓸하거나 외로운 사람이 없기를.
혁명의 땅 프랑스에서, 그 기운을 담아 천 잔의 커피를 보낸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프랑스에서도 수천 개의 빛을 뿜어내는 에팔탑 앞에서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며 마음을 보태겠다. 따뜻한 커피에, 여의도에 있지 못하는 아쉬움과 그래서 더 고마운 마음을 담아 보낸다. 당신에게 닿기를 바라며.
프랑스에서 @bygrida
※ '그리다'님의 글 원문은 <커뮤니티/자유게시판>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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